무궁화동산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55-5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무궁화동산은 옛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전가옥 터에 마련된 시민휴식공원이다.
본래 이곳은 청와대 구내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나 1993년 청와대 앞길이 개방된 뒤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태극무늬로 무궁화를 심었으며, 중앙에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 정’ 자의 분수대가 놓여 있다.
주변에 자연석으로 성곽을 만들고 240m의 산책로 주위에는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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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통인동의 골목 안쪽, 동네 살림을 책임지는 통인시장이 있습니다. 통인시장이 언제부터 이 골목에 자리잡았는지는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시장에서 대대로 장사해온 분들이,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대, 서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폭격과 군인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 되었지만, 경복궁과 중앙청 등 큰 건물들이 있었던 종로일대는 민가들이 일부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들, 휴전선이 생기면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가족의 생사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서울에 남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했습니다. 사람이 몰리자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를 사고 팔았고, 한 골목에 모이면서 통인동에 있는 ‘통인시장’이 되었습니다. 통인시장에서는 맛있는 음식도 팔고, 튼튼한 물건도 팔았지만, 무엇보다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쟁 때 헤어진 가족의 생사, 남겨두고 온 가족의 생사. 시장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은 고향 생각나는 음식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모두의 소식이 통하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경복궁 옆 동네, 청와대에서 가까운 동네가 되면서 이 곳은 개발제한 구역이 되었습니다. 어느날부터 동네에 사람들이 떠나고, 시장을 누비던 상인들도 하나 둘 떠나며 빈 가게도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시장을 지키고 싶었던 상인들은 고객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경복궁 옆에 있다는 장점을 살려서, 조선시대 시장처럼 엽전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엽전으로 시장 안에 있는 가게에서 음식을 사서, 도시락에 가득 담으면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한 끼 식사가 완성되는 겁니다. 통인시장 중간에 있는 ‘엽전 도시락 카페’에 가면 현금을 엽전과 도시락 식판으로 바꿔줍니다. 식판을 들고 시장을 누비다 보면 기름떡볶이, 닭강정, 김치, 샐러드까지 식판 가득 담아와서 먹을 수 있습니다. 맛도 가득 담아 먹고, 엽전으로 조선시대 체험도 해 볼 수 있는 문화와 맛이 공존하는 통인시장입니다.
대본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집안에서 독립운동가가 한 명도 나오기 어려운 시기에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이 있습니다. 바로 우당 이회영선생의 가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유승으로, 고종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선비입니다. 이조판서는 지금으로 치면 장관인데, 관리를 채용하는 이조를 통솔하는 직책입니다. 이회영 선생은 6형제 중 넷째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를 보낼 계획을 세운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헤이그 특사가 실패하고,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조약이 체결되자, 형제들을 불러 회의를 시작합니다. 6형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해 학교를 세우자 결의합니다. 그래서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현금과 식량을 마련하고,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식솔을 챙겨 만주로 떠납니다. 그들이 처분한 땅은 대부분 서울 명동과 종로 일대의 땅이었는데,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600억원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만주 삼원보에 정착한 6형제는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세워, 조선인을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길 원하여 ‘신흥무관학교’로 확장하게 됩니다. 많은 학생들을 교육하다 보니 자금이 부족해졌고, 이회영선생의 부인이 삯바느질로 독립자금을 모아 보태는 상황이 매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간도 잠시. 일본군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1920년 신흥무관학교는 문을 닫게 됩니다. 이 후에도 이회영 선생은 항일투쟁을 이끌었는데, 1932년, 중국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같은 해 11월에 순국합니다. 그의 형제들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거나,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유일하게 살아 남은 다섯째 이시영만이 광복된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과 가족들의 이야기는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들이 용감하게 활동하면서 6형제의 의지를 이어나갔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조국의 사람들은 6형제를 잊지 않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우당기념관’을 세웠습니다.
대본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의 남쪽에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요인과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국가의 대표인 대통령이 머무를 공간이 필요해 진 상황에서, 경복궁 뒤에 있던 ‘경무대’가 선택되었습니다. 경복궁의 북쪽은 조선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한 이후, 시대에 따라 여러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곳을 총독 관저로 사용했고, 광복 이후 미군정시대에는 미군 사령관이 사용하는 관사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 후, 이승만대통령이 이곳을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하면서, 경복궁의 ‘경’자와 신무문의 ‘무’자를 따와 ‘경무대’라 부르게 된 것 입니다. 그렇지만, 이승만대통령의 독재가 길어지면서, 경무대는 독재의 기관이라는 이미지가 생깁니다. 2대 대통령이 된 윤보선 대통령은 독재의 이미지를 없앤 새로운 이름을 생각하는데, 건물의 기와가 푸른색인 것에서 착안해 이름을 ‘청와대’로 바꿉니다. 이 후 청와대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 건물들이 주변으로 들어섭니다. 무궁화동산은 청와대의 바로 옆에 있어서 오랜 시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안가’라 불리는 안전가옥이 있었는데, 군사독재정권 시절, 대통령을 보호한다는 의미의 시설이 있었던 곳입니다. 1993년 2월,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14대 대통령이 된 김영삼 대통령이 안가를 없애고, 공원을 조성하여 개방합니다. 무궁화동산의 입구 표지석에는 ‘새로운 국민시대의 개막과 함께 열린 이 공원이 청와대를 찾는 여러분의 쉼터로, 그리고 어려웠던 민주화의 길을 되돌아 보는 역사의 배움터로 사랑 받기를 바랍니다’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개방되지 않았던 공간이,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돌아온 상징적인 공간이 된 것 입니다. 무궁화동산은 여름에 가면 활짝 핀 무궁화를 볼 수 있습니다. 만개한 무궁화동산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공원 중앙에 가면, 다양한 무궁화의 종류를 설명한 안내판이 있는데, 흰색, 분홍색, 다홍색 등 색상이 다양하지만, 암술의 머리가 5개이고, 새로 자란 잎에서만 꽃이 핀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한반도 어디에서나 잘 피어나는 꽃, 무궁화동산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돌려받은 자부심도 함께 피어있습니다.
대본
[김상궁] 경복궁 향원정 북쪽에는 건청궁(乾淸宮)이라고 불리는 전각이 있습니다. 이 곳은 1873년, 고종이 왕실가족의 사유재산을 사용해서 지은 전각인데,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마무리하고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면서 아버지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만든 건물입니다. 궁궐 안에 또 다른 궁궐을 만든 셈인데, 이 곳에서는 고종과 왕비 민씨가 살았습니다. 고종은 이 곳에서 여러 나라의 공사들을 접견했었고, 1887년, 이곳에 조선 최초의 전등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김내관] “하지만, 1895년, 건청궁 안의 옥호루에서 왕비마마가 시해 당하는 통탄할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상궁] “을미년에 일어난 시해 사건이라고 해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에 따라 일본 낭인들이 침입해서 왕비와 왕비를 지키던 궁인들을 살해합니다.” [김내관] “그들은 살해한 시신을 근처의 숲으로 가져가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했다며 거짓말을 했고, 일본정부는 재판에서 이들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방면했습니다. [김상궁] “어휴, 정말 들을수록 가슴이 아프네요.” [김내관] “이 후에 충격을 받으신 고종전하께서는 다음해에 세자저하(순종)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하지요.” [김상궁] “아관파천 때 건청궁을 떠난 왕실가족들은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고, 이 건물은 1909년에 헐렸습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2007년에 복원된 새로운 건청궁이지요”
대본
[김상궁] 경복궁 신무문을 통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건물이 바로 집옥재 입니다. 집옥재는 독특한 모양의 건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조선 왕궁 안에 있지만 청나라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이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원래 집옥재는 고종이 창덕궁에 머무를 때 지어졌는데, 1888년, 경복궁의 건청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함께 오게 된 건물입니다. 이름의 뜻은 ‘옥처럼 귀한 보물을 모아두는 곳’이라는 뜻인데, 그 보물이 바로 책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또 하나의 보물도 모시고 있었는데, 바로 고종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셨던 곳입니다. [김내관] 개항 이후 외국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집옥재를 지을 때,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건축양식으로 짓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청나라에는 서양식 건축양식과 혼합된 가옥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집옥재도 그런 시대적인 건축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김상궁] 우선, 조선의 왕실 전각과 다른 부분은 편액이 세로로 써진 점입니다. 보통 조선에서는 현판이나 편액을 걸 때 한자를 가로로 쓰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당시 청나라에서는 한자를 세로로 쓴 편액을 걸었습니다. [김내관] 집옥재의 양 옆으로 연결된 건물은 협길당(協吉堂)과 팔우정(八隅亭)인데, 이 두 건물과 집옥재가 이어진 벽면을 보면, 벽돌로 마무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것도 청나라 건축에서 보이는 방식이지요. [김상궁] 집옥재의 안 쪽으로 들어가면 동그란 창문도 볼 수 있습니다. 천장장식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운데에 용이 있습니다. [김내관] 지금의 집옥재는 예전의 용도를 살려서 도서관으로 사용중입니다. 경복궁 입장권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책을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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