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공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공원길 192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와룡공원은 삼청근린공원, 창경근린공원, 북악산 도시자연공원이 연접해 있다. 토심이 얕아 수목생
육이 어렵고, 아카시나무 등으로 산림이 조성되었으나 주민들이 생명의 나무 천만 그루 심기 행사
특히, 봄에는 산수유, 매화, 진달래, 개나리 등이 피어나 가족단위의 나들이 코스로 좋다.
있다. 특히, 봄에는 산수유, 매화, 진달래, 개나리 등이 피어나 가족단위의 나들이 코스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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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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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와룡공원 돈가스 집과 마전터, 용마루 등 유명한 식당들이 몰려 있는 한양도성으로 올라가는 성북동 쉼터, 성북동쪽에서 한양도성으로 올라가는 출발점은 늘 여기입니다. 성북동쉼터에서 성곽을 따라 부지런히 올라가면 와룡공원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와룡공원은 공원의 능선이 용이 누운 것처럼 평지에 가깝게 뻗어 있으며 한양도성은 이 공원의 긴 능선을 따라 혜화문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성곽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도성 밖 성북동, 오른쪽이 도성 안 명륜동입니다. 이곳에서 성북동을 바라보면 부촌과 빈촌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와룡공원 옆에는 배드민턴장이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운동을 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이 애용하는 곳입니다. 사실 와룡공원의 백미는 야경에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멀리 N서울타워를 중심으로 서울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때로는 전망대 옆 돌계단에 앉아 가로등이 반짝이는 성북동 산동네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왠지 서글프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지는 마을의 불빛이 아늑하고 정답습니다. 와룡공원은 연인들이 늦은 밤 호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공간이자, 사는 일이 힘겹고 우울할 때 올라가서 위안을 받고 내려오는 치유 공간입니다. 공원에 오를 때마다 자연은 위대하다고 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대본
1900년대에 지어진 이종석 별장은 이태준의 수연산방 맞은편 언덕에 있습니다. 성북구에서는 보기 드문 조선시대의 한옥입니다. 이 집을 지은 사람 이종석은 거부이기도 하고,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양반들의 별장은 주로 여름에 사용했는데, 그래서 누마루라고 하는 온돌이 들어가지 않고, 한쪽으로 툭 튀어나온 공간이 존재합니다. 난방이 필요 없기 때문이죠. 워낙 번듯하고 잘 지어진 건물이라 본래 왕족의 별장이었다고 하는 말도 있는데,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연못도 있었는데, 역시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현재는 덕수교회에서 영성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평일에는 개방되어 있습니다. 『덕수교회50년사』에는 이종석 별장에서 구인회의 멤버였던 이상, 정지용 등이 이태준과 함께 어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 바로 맞은편이니 그럴 법합니다. 조선시대 부호의 삶과 근대 문인들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이종석 별장입니다. (이 가이드는 배우 이초롱 님의 목소리로 녹음되었습니다.)
대본
심우장(尋牛莊)은 북정마을 중간 북사면에 지어진 집입니다. 1933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이 결혼을 하고 이곳으로 이사를 오며 지은 집입니다. 선생은 1944년 입적하시기 전까지 이곳에서 가족들과 지냈습니다. 집 이름인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소는 인간의 본성을 뜻하므로, 내 본성을 찾아가는 장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심우’에 대한 한용운의 생각은 시조 ‘심우장’에 잘 남아 있습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씨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집은 벽산 스님이 땅을 제공했고 당시 중동학교 수학 교사였던 최규동이 설계를 하였습니다. 심우장은 한용운 선생이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을 하게 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합니다. 심우장 입구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 마당 끝에 곧게 뻗은 향나무는 모두 한용운 선생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완전히 산속이었다고 하는데, 선생이 심우장에 와서 쓴 시 ‘산거(山居)’는 그 제목에서도 심우장 주변의 상황을 짐작게 합니다. 마당을 포함해 100평이 조금 넘는 이 공간은 일제강점기 ‘마지막 남을 조선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지조의 공간이었습니다. 친일파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고 하니까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1937년 간도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하다 잡혀 옥고를 치르던 김동삼 선생이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하고 아무도 감히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을 때 한용운 선생이 시신을 수습해 와 5일 동안 장례를 치른 곳이 바로 이곳 심우장입니다. 둘은 만주에서 짧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이 조헌영, 조지훈 부자입니다. 한의학자이자 나중에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 선생은 자주 한용운 선생을 찾았다고 합니다. 장례식 때는 그 아들 조지훈 선생과 함께 왔는데, 조지훈 선생은 나중에 그의 글에서 당시의 한용운 선생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조지훈 선생은 나중에 한용운 연구자가 되기도 하고, ‘지조론’이라는 글도 쓰게 됩니다. (이 가이드는 배우 이청안 님의 목소리로 녹음되었습니다.)
대본
김용준 집터는 심우장 아래, 수연산방 위쪽에 있습니다. 집터라고 하는 것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처음 버스에서 내린 건너편 정류장 벤치에 표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김용준의 집은 그 맞은 편 쪽에 있었습니다. 화가이자 미술사학자였던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1934년 성북동으로 이사를 옵니다. 그의 집 이름은 ‘늙은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노시산방(老柹山房)’입니다. 이 당호는 1년 먼저 이곳으로 이사 온 소설가 상허 이태준(李泰俊, 1904~?)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김용준은 화가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수필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많은 수필을 남겼는데, 이것은 훗날 『근원수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그의 수필에는 1930년대 당시 성북동의 모습이 잘 남아 있습니다. 특히 그의 집 부근은 완전히 산속에 가까웠습니다. 김용준은 그의 수필 「노시산방기」에 당시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오 년 전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고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하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훗날 이 집을 김환기, 김향안 부부에게 팔고 떠나게 되는데, 그때 김환기의 호 수화와 김향안의 이름에서 한 자씩을 따서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고 집의 이름을 바꾸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 가이드는 배우 김상일 님의 목소리로 녹음되었습니다.)
대본
도성 안쪽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성북동으로 빠지는 작은 암문(暗門)이 나옵니다. 이 문을 나오면 그림처럼 펼쳐진 달동네가 있는데요, 바로 북정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원래 ‘북적마을’로도 불렸는데, 조선시대 포백훈조계가 여기 있던 시절, 인부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소리, 또는 메주 쑬 때 ‘북적북적’ 끓는 소리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름다운 경관과 맑은 공기 덕분에 만해 한용운 등 가난한 예술가들이 들어와 살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과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무너진 한양도성 성곽 아래 판자촌을 이루어 살면서 마을이 커졌습니다. 마을을 한 바퀴 빙 두르는 도로는 1983년에 완공한 소방도로인데 이 도로 안팎에 500여 가구가 모여 삽니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 너른 길은 크고 작은 마을 행사가 열리는 곳입니다. 이 마을은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가이드는 배우 조은영 님의 목소리로 녹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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