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큰애기집
울산광역시 중구 문화의거리 28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울산 큰애기집은 울산 중구의 브랜드 울산큰애기의 플래그십 스토어이자 다양한 지역 정보를 제공하는 관광안내소이다.
1층은 관광안내소 겸 캐릭터상품 판매소로 운영되고, 2층은 울산큰애기의 숙소 콘셉트로 꾸며져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현실형 캐릭터인 울산큰애기에 어울리게 소녀들의 판타지를 재현한 방은 어린 자녀를 둔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특히 인기 있는 공간이다.
3층은 비즈니스룸으로 문화예술업 종사자들을 위한 세미나실, 관광객들을 위한 휴게실과 자료 검색 공간 등으로 꾸며졌다.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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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울산 동헌 및 내아 울산광역시 유형유산인 울산 동헌 및 내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기구였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오늘날의 울산시청과 같은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관아에는 관리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인 동헌, 그 식솔들이 살던 살림채인 내아, 공간 분할을 해 주던 아문과 문루와 같은 많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10년 일제가 ‘읍성철폐령’을 시행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울산 동헌 및 내아 역시 이때 철거되었다가 1981년 복원을 통해 동헌, 내아, 오송정 등이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울산 동헌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관리는 종3품의 도호부사입니다. 도호부는 부와 목 사이의 군사적 성격이 강조된 지역으로 도호부사는 이러한 도호부에 파견된 관리입니다. 참고로 조선은 수도 한성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부·목·군·현으로 나누어 부에는 부윤, 목에는 목사,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을 각각 파견했습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막강한 권한이 있었지만, 임기도 짧고 해당 지역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을을 다스리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방관들은 그 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칭송받았던 관리들은 그 지역에 사당이나 비석 등이 세워져 지방관의 업적이 남겨졌습니다. 울산 동헌 뒤편에 세워져 있는 선정비는 그러한 그들의 업적이 담긴 비석들입니다. 한편 동헌은 1681년 숙종 7년에 부사 김수오가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695년 숙종 21년에 그의 아들 김호가 부사로 부임하면서 일학헌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1763년 영조 39년에 부사 홍익대가 중창하여 반학헌으로 그 이름을 개칭하였습니다.
대본
여 : 묘기 부리듯 머리에 항아리를 얹고 종종 걸음 치는 아낙네들. 남 : 지게가 휘어질 듯 짐을 지고 목청 좋게 외치는 장정들. 여 : 커다란 함지박에 야채나 곡물을 담아 파는 할머니들. 남 : 장터하면 떠오르는 풍경이죠? 현재 ‘문화의 거리’로 조성돼있는, 중구 옥교동 일대의 거리는 울산읍성의 장터가 있었습니다. 여 : 그곳은 ‘장터걸’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요, ‘장이 열리는 길’이라는 뜻이죠. 일제 강점기에는 ‘혼마치’라는 일본식 이름이 붙기도 했지만 장터걸 구석구석 스며있는 민초들의 활력과 생동감은 꿋꿋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남 : 장터걸은 5일과 10일에 장이 서는 5일장이었는데요, 장날만 되면 길이 꽉 들어찰 만큼 인파와 물자가 모여들곤 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으니 물건이나 돈만 오간 건 아니었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해 듣는 건 물론이고, 일제 강점기에는 울산군청, 우편국, 면사무소, 금융조합을 비롯해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근대적 행정의 거점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 : 사람이 모이고 돈이 오고 가면서 행정과 상업이 견고하게 발전하는 과정은 도시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한데요 오늘 그곳에서 마신 차 한 잔이나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은 훗날 또 어떤 역사로 기억 될까요?
대본
남 : 우리 잠시, 시계바늘을 약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볼까요? 여 : 1917년 울산에서는 ‘제2회 농수산물 품평회’가 열립니다. 그 행사의 내빈들을 위해 ‘울산 안내’라는 가이드북이 발행 되는데요, 책 속에는 울산의 명소와 특산품 등이 소개되고 요리집,약종상,잡화상,과자가게 등을 선전하는 예순 아홉 개의 광고가 실립니다. 그중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맛있는 요리를 선보인다고 자부하는 광고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광고주는, 바로, 학성여관이죠. 남 : 학성여관은, 지금으로 치면 중형급 정도의 호텔입니다. 2층짜리 일본식 건물에, 연 면적이 1,800제곱미터에 이르는, 당시 울산에서 가장 큰 여관이자 사교와 회합 그리고 행사의 중심지였죠. 1928년 울산비행장 개장식도 학성여관에서 열렸고 6.25 전쟁을 겪을땐 피난민들의 거처로 또 6,70년대에는 경남병무청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곳이기도 했죠. 여 :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여관 영업은 중단되고 슈퍼와 신발점 커피숍 등으로 탈바꿈 했다가 2016년 문체부 사업의 일환으로 옛 모습을 복원해서 현재에 이르게 됐는데요, 울산의 가장 번화한 곳에서, 백년 넘은 세월을 묵묵히 지켜본 학성여관. 남 : 비록 간판이 바뀌고, 겉모습도 변했지만 건물의 뼈대는 옛것 그대로인데요, 세월의 풍파에도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건 뭔지...학성여관은 넌지시 물음표를 건넵니다.
대본
남 : (시 낭송)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여 : 나태주 시인의 <가보지 못한 골목길을>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울산 시내 곳곳에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알지 못하던 작은 꽃밭이 곳곳에 숨어있죠. 남 : 특히 7,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생긴 쭉 뻗은 도로와 높이 솟은 빌딩숲 언저리에는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골목길이 많은데요, ‘똑딱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여 : 문화의 거리를 걷다가 고복수음악관 쪽으로 발길을 향하면 만나게 되는 좁은 골목인데요, ‘똑딱길’이라는 이름은 산업화 과정에서 성공과 좌절을 맛본 울산의 젊은이들을 토닥토닥 위로하고, 또 그러한 과거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시계의 ‘똑딱’ 소리를 따서 만들어졌죠. 남 : 소박하고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타일조각을 붙여 만든 모자이크 작품이 눈에 들어오죠.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과 폴짝 뛰어 부케를 받는 아가씨,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노상 방뇨하는 아저씨와 아이 등이 보이구요 여 : 거기에..길 따라 놓인 작은 화분들과 한뼘 만한 꽃밭이 어우러진 모습은 나지막이 얘기를 들려주는거 같습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맘 졸이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토닥토닥...
대본
남 : (시낭송)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여 : 노래 제목이나 가수는 몰라도 한번은 들어봄직한 이 노랫말. 바로 울산 출신 가수 고복수의 ‘타향살이’ 제일 첫 부분입니다. 남 :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972년에 세상을 뜬 고복수는 가난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해서 교회에 나가 노래를 불렀고, 선교사들에게 클라리넷과 드럼을 배웠죠. 가수를 꿈꿨지만 뒷받침 해줄 집안 형편이 아니다보니, 속이 탔던 고복수는 부모님 몰래 무작정 서울로 올라갑니다. 서울 상경 1년 뒤에 ‘타향살이’를 발표했고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죠. 여 : 그때부터 고복수는 수많은 히트곡을 기록하면서 우리나라 대중음악역사에 큰 자취를 남기는데요, 청춘 고복수 재즈길은 바로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길입니다. 남 : 소박하면서도 아련한 음색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 그리고 전쟁을 겪은 우리 모두의 아픔을 달래준 고복수. 여 : 골목 굽이굽이에는 그의 음악인생이 엿보이는 기념물과 벽화 그리고 음악살롱이 들어서 있는데요, 그를 기념하는 장소가 낡고 오래된 골목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복수의 노래는 찬란한 행진곡풍이 아니라 잔잔한 위로와 애수를 전하는 야상곡과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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