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사(성북)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사길 6-16 (보문동3가)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보문사와 담장 하나 사이에 있으며, 탑골승방으로 잘 아려진 미타사는 여승들의 거처이다.
이 사찰은 950년에 혜거국사가 처음 창건하고 미타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1047년에는 석탑을 조성하여 탑골승방이라 하였다.
석탑은 대웅전 뒤 단하각 왼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장소 소개
위치
이런 곳도 함께 보세요
같은 유형의 인기 명소오디오 가이드
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노동사목 표지석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강화읍 거리는 하루 두 번 직물공장 교대시간에 맞춰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앳된 얼굴의 여공들로 넘쳐났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은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시집가기 전까지 직물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강화읍내 재부분의 사람들은 직물공장에서 일하며 먹고 살았어요. 여러 직물공장 중에서도 심도직물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커서 매일 1,200여 명의 노당자가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를 해야 했던 곳입니다. 그 덕분에 심도직물의 '웸블리넥타이'는 '심도직물'의 대표적인 수출상품으로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고 수출역군으로 칭송 받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 성과 뒤에는 노동자들의 고된 땀방울이 가득했습니다. 노동력이 부족해진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하루 12시간도 강행군인데 휴일 전날 야간조는 24시간에 가까운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어린 소녀 노동자들은 밤샘 작업에 시달리며 코피를 쏟는 일이 잡았고, 공장의 먼지 때문에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1967년 5월 300여명의 직원이 참여한 노조가 결성되었는데, 전미카엘 신부를 주축으로 한 가톨릭 도통청년회(JOC)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노조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직물회사와 토쟁을 시작하자 회사는 지속적인 노조 와해 작업을 펴고 조합원을 탄압하는 등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주교단이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를 지지하자 심도직물이 속한 강화직물업자협회는 노조와 조합원 탄압을 철회하고 해고 노동자 복직을 약속했습니다.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천주교 강화성당에 노동사목 표지석으로 남아 기억되고 있습니다.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으로 가톨릭 노동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천주교 강화성당에 노동사목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방직산업과 강인한 생활력을 자랑하는, 손재주가 남달랐던 강화 여성들은 서로 필요충분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직물 생산의 노동자가 되어 강화의 경제를 일으켰던 강화도 여성들의 억척스럽고 열악한 삶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사에 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Nearby places worth pairing
Live distance-sorted picks around 미타사(성북)Book 미타사(성북) via our partners
Compare tours, skip-the-line tickets and nearby st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