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인근린공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숭인근린공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동망산에 있는 공원이다.
동망산공원이라고도 한다.
1980년에 개원한 도시공원으로 주민들이 휴식과 산책,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1980년에 개원한 도시공원으로 주민들이 휴식과 산책,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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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이제 돌아서서 걸어온 길을 보세요. 남쪽으로 동대문에서부터 낙산 성곽 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만났나요?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어요. 우리가 걸어 올라온 이곳은 ‘창신동 절벽 골목’이라고 불러요. 절벽 골목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북쪽 풍경을 보면 알 수 있죠. 건너편으로 보이는 숭인동 동망봉이 흉물스럽게 잘려 나간 곳, 움푹 파여서 절벽이 된 곳이 보이지요? 일제시기 화강암 채취를 하면서 생겨난 곳입니다. 우리가 걸어 올라온 낙산 역시 동망봉 쪽으로 채석장이 만든 절벽이 있답니다. 1910년 일제는 국권을 침탈한 뒤, 식민지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을 계획을 세웠어요. 남산의 총독부 건물이 좁다고 느꼈기 때문이었겠죠. 새로운 총독부 건물은 경복궁 안쪽에 일본의 권위가 최대한 드러나도록 거대한 서양식 건축물로 지었어요. 이를 위해 압록강 인근의 낙엽송, 경기도와 황해도의 대리석, 한강의 모래와 자갈을 비롯해 20만 개의 화강암이 들어갔죠. 바로 이곳이 그 화강암을 채취한 곳입니다. 1924년에는 아예 이곳을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지정한 뒤, 날마다 발파를 이어가며 화강암을 채취했다고 해요. 그렇게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공되었고, 조선은행, 서울역, 경성부 청사도 이곳에서 화강암을 채취해서 지었죠. 창신동과 숭인동의 채석장은 광복 이후에도 얼마 동안 쓰였어요. 그러다가 1960년 폐쇄된 이후 절개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죠. 그곳을 지금은 절개지 마을 혹은 절벽 마을이라 불러요. 서울의 한복판, 종로에 이런 일제 침탈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또 이렇게나 올망졸망 어찌 보면 아슬아슬한 모습의 집을 짓고 삶을 이어 왔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들이 더욱 많고요. 이곳에서 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풍경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채석장 흔적, 그리고 반대편의 고층 빌딩이 만드는 마천루. 두 개 모두 지금 종로, 서울의 모습이겠죠? 다음으로 우리가 갈 곳은 아래쪽 도로 옆에 있는 창신초등학교입니다.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가면 왼쪽으로 ‘종로 종합 사회복지관’이 보일 거예요. 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큰길까지 쭉 내려가다 보면 창신초등학교가 나와요. 길이 그리 넓지 않고 경사도 불규칙해요. 천천히 그리고 조심해서 내려가는 거 잊지 마세요. 창신초등학교 정문 옆 벽면을 보면 ‘원흥사 터’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어요. 거기에서 말씀을 이어갈게요.
대본
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지금은 주변에서 사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곳은 1902년, 조선의 여러 절을 총괄하는 사찰 인 원흥사가 있었던 곳이에요. 광무 6년(1902), 고종은 황실의 재산으로 현 창신초등학교 부지를 사들이고 ‘대본산 원흥사’라는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해요. 사실 승려들은 조선 시대 내내 도성에 출입할 수가 없었어요. 1895년 수백 년 만에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허가되면서 비록 동대문 밖이긴 하지만 도성 근처에 원흥사가 지어질 수 있었다고 해요. 이후 원흥사는 대본사의 지위는 잃게 되었지만 1906년에 지금의 동국대학교로 발전하게 되는 불교 전문 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이곳에 세웠어요. 또 1908년에는 승려 대표 52명이 이곳에 모여 한국불교종단의 이름을 ‘원종’으로 부르기로 정했죠. 그리고 지금의 종로구 조계사 인근에 각황사를 세워 원종 종무원을 그쪽으로 옮겨 갔어요.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사찰령을 시행하며 원흥사는 폐사되어 없어지고 이듬해 능인사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가 4년 후 현 창신초등학교가 개교했죠. 이제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향해 걸어가야겠네요. 종로로 걸어가 ‘동묘앞역’에서 3번 출구 쪽으로 가 볼게요. 그곳이 우리가 다음에 살펴볼 동묘 벼룩시장이에요.
대본
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동묘 담벼락을 따라 줄지어 있는 노점들이 보이나요? 얼핏 둘러봐도 정말이지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어요. 새 물건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고 물품들이 눈에 많이 띄는 곳이죠. 이곳에 시장이 처음 생긴 것은 꽤 오래전 일이죠. 동묘 벼룩시장 아래쪽으로 있는 청계천 영도교에서 그 내력을 찾을 수 있죠. 영도교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진 곳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단종은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에서 쫓겨난 왕이죠. 단종과 정순왕후는 영도교에서 헤어진 뒤, 단종은 영월로 가고 정순왕후는 숭인동에 초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단종은 영월에서 17살 나이로, 정순왕후는 숭인동에서 82살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니까, 이곳이 서로의 얼굴을 본 마지막 장소가 된 거지요. 그래서 다리의 이름도 영영 이별했다고 해서 영 이별다리, 영 건넌 다리, 영도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세조의 도움을 거부하며 어렵게 생활했다고 해요. 근방의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이곳에서 채소시장을 열었다고 해요. 남자들은 들어갈 수 없어서 여인 시장이라고 불렸답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곳에 다시 시장이 생긴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지금의 동묘 벼룩시장은 1980년대부터 상인들이 모여들며 생겨난 중고 만물 시장이지요. 가전제품, 시계, 책, 공구류, 신발에 다양한 종류의 의복까지, 정말 없는 게 없이 다양한 물건을 파는 곳이에요. 특별한 물건 몇몇을 제외하면 만원으로도 여러 가지 물건을 살 수 있는 시장이지요. 2000년대 초반, 청계천 복원공사로 근처의 황학동 벼룩시장이 축소되고, 터전을 잃은 상인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면서 더 많은 상인으로 붐비게 되었다고 해요. 평일은 그래도 한가한 편이지만 주말이면 상인들과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지요. 벼룩시장이 기대고 있는 동묘는 중국의 관우에게 제를 올리는 사당입니다. 임진왜란 때 한양에 머물렀던 명나라 장수의 권유로 남관왕묘와 동관왕묘를 짓고 이후 고종 때 북묘, 서묘까지 지어졌다고 해요. 일제 시기에 동묘만 남겨 놓아서 이제 관우의 사당은 여기에서만 볼 수 있죠.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을 문묘라 하고 관우를 군사의 신으로 모셔 무묘라 했어요. 시끌벅적한 벼룩시장과 달리 동묘 안은 사당의 경건함이 느껴지는 곳이에요. 조선과 중국의 장인이 힘을 합쳐서 지은 사당 건물이라서 한국 분위기, 중국 분위기가 모두 느껴집니다. 자, 그럼 이제 동묘 벼룩시장을 떠나 인생의 길 다음 목적지로 떠나볼까요? 동묘앞역 6번 출구로 가지요. 6번 출구 앞 큰길은 ‘박수근 길’이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 박수근이 창신동 393-16(지봉로11)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집은 사라지고 지금은 박수근의 집터였음을 알려주는 조형물과 표석을 만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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