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자하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 118 (부암동)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서울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 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1413년(태종 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이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422년(세종 4)에는 군인들의 출입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고, 1617년(광해군 9)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의 운반을 위해 열어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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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창의문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창의문은 태조 5년(1396) 한양도성을 쌓을 때 사대문 사이에 만들어진 사소문 중 하나입니다. 이후 태종 16년(1416)부터 문이 닫혀 왕명이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했습니다. 그 이유는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학적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반듯한 자태로 백악에 앉은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화관광해설사들은 “1623년 인조반정을 도모한 이괄과 이귀가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이곳 창의문을 거쳐 궁궐로 들어갔다.”며 “무지개 모양 월단 맨 위에 봉황 한 쌍이 새겨졌는데, 창의문 밖에 지네가 많아 천적인 닭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현재의 문루는 영조 17년(1741)에 세운 것으로 석축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 같은 양식이고, 그 위에 단층으로 세웠습니다. 겹처마를 인 창의문은 가파르지 않은 물매가 유려합니다. 겸재 정선은 백악, 솔숲, 골짜기, 부침바위와 함께 창의문을 그려 산수의 일부로 표현 했습니다. 그 옛날 창의문은 북한산성과 양주로 통하는 교통로였지만, 풍수지리설에 따라 수백년간 문이 닫혔으며 중종 원년(1506)에 다시 문이 열려 왕래가 시작됐습니다. 지금은 문 서쪽으로 난 도로가 통행로로 이용되어 여전히 닫힌 문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적이 끊긴 문은 ‘창의’란 이름 그대로 의롭게 서울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대본
"2코스 독립과 매국의 길 배화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중심인물 (안내) 가수 송민경 (배역) 김경화(배화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중심인물)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독립과 매국의 길’을 안내할 김경화입니다. 아, 제 이름이 조금 낯선 분들이 대부분이실 것 같은데요, 저는 100여 년 전 배화여학교에 다녔던 학생입니다. 나름 중요한 일을 했다고 자부하는데요, 저의 모교인 배화여학교가 이번 코스에 포함되어 있어서 오늘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동네를 무척 사랑합니다. 등하교하던 길, 그리고 동무들과 놀러 갔던 곳들을 여러분과 함께 돌아보게 되어 무척 가슴이 설렙니다. 무엇보다 인왕산 자락의 유서 깊은 곳에 포근하게 안겨있던 제 모교가 여전히 남아있어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지만 또 이곳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소개하려고 하니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독립과 매국의 길’을 떠나 보겠습니다. 제가 안내할 길은 인왕산 동편 자락에 남아있는 근대 인물들의 흔적을 따라 걷는 코스입니다. 먼저 동네 소개를 해야겠네요. 이 동네의 배경이 되는 인왕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의 서북쪽을 둘러싼 병풍과 같은 산이죠. 경복궁 서쪽의 웅장한 바위산의 위용을 자랑하는 산이지만, 제법 숲도 우거지고 맑은 계곡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지위는 높았지만,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왕실의 종친들이 터를 잡고 자연을 벗 삼아 지내던 곳입니다. 조선 후기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는데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인왕산의 좋은 경치를 찾아 들어왔고요, 국권을 빼앗긴 시절에는 친일매국 인사가 거창한 집을 짓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서울, 곧 한양이나 경성의 중심과 가까워서 시대와 같이 호흡하려는 근대의 문인들이 고뇌하며 작품을 구상하던 곳이기도 했죠. 사실 문학은 아직도 저에게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긴 합니다. 자, 이렇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왕산 자락을 저와 함께 걸어 보실까요. 먼저 찾아볼 곳은 바로 윤동주 문학관입니다. "
대본
"2코스 독립과 매국의 길 배화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중심인물 (안내) 가수 송민경 (배역) 김경화(배화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중심인물) 여기는 참 유명한 곳이죠. 문학관인데 건물의 모습이 조금 독특합니다. 윤동주 문학관은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활용해 조성했다고 해요. 거대한 물탱크가 전시 공간으로 바뀌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문학은 잘 모릅니다만, 수도관을 통해 물을 보내던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문학의 기운을 듬뿍 보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도가압장을 문학관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의 이미지에서 착안했다고 해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우리말과 우리 글을 사랑했던 젊은 시인의 작품과 서신,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윤동주 시인을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문학관 바로 위쪽에 있는 시인의 언덕과 관련이 있어요. 윤동주가 서울에서 공부하던 때, 이 일대를 친구들과 거닐고 사색하며 그의 대표작들인 ‘서시’, ‘별 헤는 밤’ 등의 시를 썼다고 하죠. 시인의 언덕에는 정말 아름다운 시, ‘서시’의 시비가 세워져 있어요. 뭐랄까, 이 시를 읽으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듯하지만, 또 어디선가 뜨거운 무엇이 솟아나는 것도 같아요. 아, 제 감상이 너무 길어졌나요? 그럼 이 얘기는 어떨까요? 이 시비를 세울 때, 시인의 무덤이 있는 북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흙을 이곳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시인의 자취가 남은 또 하나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잠시 윤동주 시인에 대해 살펴볼까요. 조사하느라 조금 힘은 들었지만 아주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보다 한참 동생이네요. 하하~ 참, 명동촌은 1899년 함경도 이주민들이 건설한 한인 마을로 일찍부터 신학문과 개신교를 받아들인 곳이었는데요, 시인은 거기에 있는 명동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짓고 많은 책을 읽었던 윤동주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운 것은 1938년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였죠. 그곳에서 국어학자 최현배의 조선어, 역사학자 손진태의 역사, 영문학자 이양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우리 민족의 말과 글, 정신에 대한 감수성을 길렀다고 해요. 사실 저도 우리 학교, 그러니까 배화여학교 여러 선생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언론인이자 근대 계몽사상가이신 남궁억, 차미리사 선생님이 그립네요. 차미리사 선생님은 여성이기 이전에 조선인으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가르쳐주셨죠. 아,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 북간도에서 태어나 정체성이 모호한 국경 밖의 경계인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고뇌하며 자신의 생각을 시로 표현했어요. 시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았던 윤동주 시인이 1년이나 시를 쓰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전쟁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해였죠. 고민이 컸던 탓에 시를 쓰지 못했던 시인은 이후 자신의 방황과 고민을 솔직하게 표현한 시를 발표했어요. 그의 유명한 시 ‘서시’ 이때 작품이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촌 송몽규와 함께 ‘조선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아요.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맑고 순결한 영혼이 스러지고 만 것인데요, 윤동주 시인은 또 다른 면모도 있었습니다. 2010년 윤동주의 재판 기록이 공개되었는데요, 그는 일본의 재판정에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키워 독립운동의 바탕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서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은 패해야 한다’며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어요. 일본 유학 전에 윤동주는 시를 발표하려고 했지만, 일제치하에서 그의 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고요, 해방 이후에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의 시집으로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흔적이 전해지는 또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걷는 그 길을 윤동주 시인도 걸었을 겁니다. 어떠세요?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이제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자유롭게 읽고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안내할 길은 인왕산 숲길을 따라 수성동 계곡으로 가는 길입니다. 앞서 살펴본 ‘1.21’ 사건으로 생겨난 인왕산순환도로를 따라 만든 나무 데크와 오솔길로 이루어진 인왕산 자락길입니다. 조금 먼 길이지만, 그의 시와 함께 걸어 볼까요? (시 몇 편을 낭송한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와 함께 걷는 길, 시인과 함께 걷는 길이기도 하네요. 시를 읽으며 바라보는 풍경이 놀랍기만 합니다. 정말 장관이지요? 제가 학교를 다니 던 시절, 100여 년 전의 서울은 경성으로 불렸어요. 아직 조선과 1897년에 조선이 제국을 선포해 세운 대한제국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죠.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기와집이 옹기종기 시내와 산자락을 가득 채우고 있었죠. 그러나 이전에 볼 수 없는 거대한 건물이 하나, 둘 들어섰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았던 거대한 조선총독부 건물일 겁니다. 또 남산에 있는 신사인 조선신궁은 마치 조선 땅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우리의 서울 모습 이지요. 서울, 참 가슴 벅찬 이름입니다. 그 서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물이 나올 거 같아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제가 안내할 다음 장소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할게요. "
대본
"1코스 1.21길 서울의 중심 종로에 큰 변화를 일으킨 1968년 1.21 사건 뒷 이야기 (안내) 배우 오만석 (배역) 최규식경무관(前 종로경찰서장) 창의문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북문인 숙정문과 서문인 돈의문 사이에 있는데요, 창의문은 한양의 서북쪽 출입을 담당했던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창의문 아래, 청운동을 자하골이라고 해서 창의문은 자하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의 안팎을 나누는 공간이었을 텐데요, 지금은 서울 도심, 종로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진입 공간이기도 합니다. 인조반정 때는 반정군이 닫혀있는 문을 열고 도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인조반정 당시 반정공신의 이름이 편액에 적혀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북한산성이 생기고 또 탕춘대성이 생기며 창의문은 다른 성문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비록 작은 문이지만 한양도성과 서북쪽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거지요. 1.21 사건 때도 31명의 무장공비는 이곳으로 와서 청와대로 진입하려고 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는데요, 그 이야기는 창의문을 지나 조금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
대본
"1코스 1.21길 서울의 중심 종로에 큰 변화를 일으킨 1968년 1.21 사건 뒷 이야기 (안내) 배우 오만석 (배역) 최규식경무관(前 종로경찰서장) 자, 이제 제 모습이 보이시나요? 네, 맞습니다. 흉상의 주인공은 정종수 경사, 그리고 전신상으로 서 있는 동상이 바로 저, 최규식입니다. 저는 1968년 당시 종로경찰서장이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밤, 종로경찰서 관할인 자하문 검문소로부터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특수부대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경찰의 제지를 뿌리치고 시내 쪽으로 걸어갔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지체 없이 기동타격대와 함께 창의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무장공비하고 대치하게 된 것이죠. 그때 시내버스가 지나갔는데요, 지원부대가 도착했다고 생각한 공비들이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상호 목숨을 건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더 이상 큰길로는 진격이 어렵다고 생각한 공비들이 흩어지려고 할 때, 저도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아, 제가 그만 총에 맞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힘을 다해 정신을 차리고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후 상황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경찰과 군대의 필사의 전투 끝에 무장공비 31명 중 대부분 사살하고 유일하게 생포 된 1명이 바로 김신조입니다. 사실 우리 쪽 피해도 컸습니다. 저를 포함해 정종수 경사가 죽는 등 모두 75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민간인도 7명이나 죽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다면 후배 경찰들이 저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1968년 1월 21일 이후 더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이 변화, 발전하는 모습을 보았고요, 당시 전쟁터와 같았던 이곳을 즐겨 찾는 내외국인들의 모습도 보고 있습니다. 아쉬움도 있지만 임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웃을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이 자리에서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께 들려드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아, 제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길을 건너서 오른쪽, 그러니까 도심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부암동주민센터가 있습니다. 주민센터 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 걸어가면 2014년에 조성한 무계원이 있는데요, 그곳에서 오늘의 임무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걸어오시느라 힘들었을 텐데요, 1코스의 마지막 일정을 향해 조금만 더 힘을 내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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