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읍약수터
인천광역시 강화군 북문길 110 오읍약수터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강화 산성 북문을 지나 숲 속 오솔길을 따라가면 오읍(五泣) 약수터가 있다.
고려 고종 때 북문 건축 시 기우제를 올려 하늘에서 내려주었다는 약수이다.
또한, 오읍약수터는 넓은 휴식 공간과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이곳은 단순히 약수를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로도 사랑받고 있다.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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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이곳은 2001년 사적 제424호로 지정된 강화 성공회 성당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되어 영국 국교가 된 성공회는 1890년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강화도에서 전교활동이 시작된 것은 1893년입니다. 성공회 강화읍 성당은 1899년 11월에 성당을 짓기 시작해서 1년만인 1900년 11월에 완성됩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통해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중층으로 된 한옥은 마치 사찰에 온 듯 착각을 하게합니다. 이 성당건물의 가치는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토착화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외래 종교이면서도 우리나라의 생활과 풍습 그리고 문화를 존중하여 외양은 전통양식인 한옥에 내부는 서양 건축양식인 바실리카 양식을 채용하면서도 건축자재나 건축기법 등은 순수한 우리 전통 방식을 따르고 있어서 동서양의 건축양식이 아름답고 절묘하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성당건물은 트롤로프 신부가 250명이 함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40칸 규모의 한옥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구상하였습니다. 트롤로프 신부는 경복궁 중수 때 참여했던 권위 있는 대목을 도편수로 고용하는 한편 성당 내부의 제대와 세례대 그리고 축대의 중요 부분과 벽돌 공사를 위해 인천에 직접 가서 중국인 석공을 고용하였고, 담장과 기와공사 기타 미장공사는 강화지방 사람들을 고용 하여 강화 돌을 다듬고 강화 흙으로 기와를 구웠다고 합니다. 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리 제작이 안돼서 수입을 해 왔다고 하네요. 건물 양 옆과 성전 뒤쪽에서 들어오는 문 4짝은 영국에서 직접 제작해와 조립 하였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강화 성공회 성당이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서구의 바실리카 성당 양식을 혼용하여 건축하게 된 까닭은 한국문화유산을 계승 하면서도 새로 전래된 기독교 서구문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뿌리내리게 함으로 신도들에게는 외경심과 경건심을 우러나오게 하고 외래종교인 교회가 토착화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자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한옥 성공회 강화읍 성당은 1910년대까지 강화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고 성공회 신학교인 성미가엘 신학교가 이곳에 설립된 이후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하였습니다. 현재도 주일마다 10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120년 전통을 잘 지켜온 강화읍 성공회 성당입니다.
대본
13세기 초 고려가 몰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 개경으로부터 천도하여 궁궐을 세웠던 터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개경의 것과 비슷하게 짓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강안정, 연경궁, 수창궁 등 크고 작은 여려 궁궐들을 이름도 같게 하여 지었고, 도성과 각 관청을 건립하였습니다. 궁궐의 정문도 개성에 있는 궁성의 정남문 이름인 ‘승평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삼층 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1259년 몽골과 화친을 맺으며 몽골 사진이 강화로 들어오고, 내외성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곽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레와 같이 온 거리를 진동 하였고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슬퍼 울었다고 합니다. 1270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2천여 명의 몽골군이 들이닥쳐 남아 있던 고나아를 모두 불태워 없앴습니다. 고려 궁지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삼문위에 걸린 ‘승평문’ 이란 현판이 한때 고려의 궁궐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할뿐, 현재 ‘고려궁지’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으나 실제 고려 궁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조선시대 들어 1631년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 시에 이용하고자 했고. 강화 유수부 ,외규장각, 장년전, 만녕전 등 많은 전각이 세워 졌으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거의 소실되었습니다. 당시 건물로는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고, 강화부종각과 2003녀네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이 있습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위한 전시수도였고, 조선시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보장 처였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 강화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게 됩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왕족과 종묘사직을 모신 대신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고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청나라에 항복하였습니다. 그 후로 보장 처인 강화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효종. 숙종 대에 진과 보, 돈대를 설치하고 산성을 쌓는 등 군사시설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켜 보장 처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갑니다.
대본
강화군은 1960~70년대 지금의 제일모직이나 선경보다 규모가 컸던 직물공장이 있을 만큼 직물산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심도직물을 중심으로 삼호, 동광, 이화직물 등 20여곳의 공장에서 소창과 비단 생산이 본격화 되었고 1960년 대 강화 가정집에는 손발로 천을 짜는 수직기가 5~6000대, 직물공장에도 역직기가 900여대 있었다고 합니다. 강화읍에만 공장직원이 4000명 넘게 살았다고 하네요. 소창은 짜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습니다. 특히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대한민국 최대의 섬유회사로 비단, 커튼지 뿐만 아니라 웸블리 넥타이를 제작하여 수출하는 등, 한때 인천의 대우자동차가 인천경제를 이끌었듯 강화경제에 큰 여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노동의 착취라는 어두운 단면도 있었습니다. 1200여명 직공들 대부분이 섬유먼지가 자욱히 날리는 기계에 매달려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을 하였고, 어린 여공들은 낮은 임금과 끼니를 자주 거르면서 영양실조에 위장병, 결핵에 대한 두려움에도 격무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심도직물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노동현실을 떨쳐 내고자 여성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저항 했고 ,전미카엘 신부 주도하에 강화읍 천주교 성당에 모여 카톨릭 노동청년회가 주축이 되는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심도직믈 사주 김재소는 노조 분회장과 조합원을 해고하고, 강화지역 21개 직물회사도 가노청 회원을 절대 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합니다. 이에 주교단 명의로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심도직물 등 강화지역 직물회사는 가노청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던 결의를 철회하고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습니다. 강화는 한때 대구, 수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직물도시였습니다. 이때 직물공업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심도직물이었습니다. 강화군에서는 용흥궁 공원 내에 강화도의 근대화를 이끈 심도직물을 상징하는 심도직물의 굴뚝 위쪽 부분을 잘라 남겨 기념하고 있습니다. 강화읍 천주교 성당에 있는 예수상 위쪽에서 이곳 심도직물 굴뚝을 바라보면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어린 여공들의 창백한 얼굴들이 무성 영화처럼 스쳐갑니다.
대본
강화산성은 고려시대 몽골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하면서 토성으로 쌓은 1.2km의 내성 터를 기반으로 다시 쌓은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는 한편 규모도 확장한 것이 지금의 강화산성입니다. 동 서 남문에는 문루가 있었으며, 소동문 소서문 북문이 암문으로 이루어진 성을 숙종 때 강화유수 민진원이 북산 견자산 남산을 연결하여 둘레 7.12km의 규모로 확장한 것입니다. 1966년 서문이 해체 복원된 것을 시작으로 1976년 남문 종해루가 중수되었고 북문 진송루는 1977년 원형대로 복원되는 등 지속적으로 복원과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산성 북장대 터에 오르면 남산 꼭대기에 우뚝 선 남장대가 보이고 돌아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황해북도 개풍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고려 강화천도 시기에는 화려했던 개경을 그리며 송악산을 오르던 사람들, 오늘날에는 남북 분단의 아픔과 실향의 슬픔을 달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북문을 통해 성 밖으로 200m 내려가다 보면 오읍약수터가 나오는데 이 약수는 고려 천도시기 성을 쌓는 노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긴 가뭄에 더욱 힘들어 하자 고종임금이 하늘에 기우제를 드리게 되었는데 ,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벼락이 내리치면서 바위가 갈라지고 바위틈에서 샘이 솟았다고 합니다. 이에 감동한 임금이 울었고 곁에 있던 신하들과 백성들 모두가 기쁨에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약수를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임금과 신하 백성이 함께 울었다고 하여 오읍약수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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