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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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LENS 큐레이션강화성당은 고요한 (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 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 중층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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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13세기 초 고려가 몰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 개경으로부터 천도하여 궁궐을 세웠던 터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개경의 것과 비슷하게 짓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강안정, 연경궁, 수창궁 등 크고 작은 여려 궁궐들을 이름도 같게 하여 지었고, 도성과 각 관청을 건립하였습니다. 궁궐의 정문도 개성에 있는 궁성의 정남문 이름인 ‘승평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삼층 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1259년 몽골과 화친을 맺으며 몽골 사진이 강화로 들어오고, 내외성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곽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레와 같이 온 거리를 진동 하였고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슬퍼 울었다고 합니다. 1270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2천여 명의 몽골군이 들이닥쳐 남아 있던 고나아를 모두 불태워 없앴습니다. 고려 궁지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삼문위에 걸린 ‘승평문’ 이란 현판이 한때 고려의 궁궐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할뿐, 현재 ‘고려궁지’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으나 실제 고려 궁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조선시대 들어 1631년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 시에 이용하고자 했고. 강화 유수부 ,외규장각, 장년전, 만녕전 등 많은 전각이 세워 졌으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거의 소실되었습니다. 당시 건물로는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고, 강화부종각과 2003녀네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이 있습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위한 전시수도였고, 조선시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보장 처였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 강화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키게 됩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왕족과 종묘사직을 모신 대신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고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청나라에 항복하였습니다. 그 후로 보장 처인 강화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효종. 숙종 대에 진과 보, 돈대를 설치하고 산성을 쌓는 등 군사시설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켜 보장 처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갑니다.
대본
강화군은 1960~70년대 지금의 제일모직이나 선경보다 규모가 컸던 직물공장이 있을 만큼 직물산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심도직물을 중심으로 삼호, 동광, 이화직물 등 20여곳의 공장에서 소창과 비단 생산이 본격화 되었고 1960년 대 강화 가정집에는 손발로 천을 짜는 수직기가 5~6000대, 직물공장에도 역직기가 900여대 있었다고 합니다. 강화읍에만 공장직원이 4000명 넘게 살았다고 하네요. 소창은 짜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습니다. 특히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대한민국 최대의 섬유회사로 비단, 커튼지 뿐만 아니라 웸블리 넥타이를 제작하여 수출하는 등, 한때 인천의 대우자동차가 인천경제를 이끌었듯 강화경제에 큰 여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노동의 착취라는 어두운 단면도 있었습니다. 1200여명 직공들 대부분이 섬유먼지가 자욱히 날리는 기계에 매달려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을 하였고, 어린 여공들은 낮은 임금과 끼니를 자주 거르면서 영양실조에 위장병, 결핵에 대한 두려움에도 격무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심도직물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노동현실을 떨쳐 내고자 여성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저항 했고 ,전미카엘 신부 주도하에 강화읍 천주교 성당에 모여 카톨릭 노동청년회가 주축이 되는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심도직믈 사주 김재소는 노조 분회장과 조합원을 해고하고, 강화지역 21개 직물회사도 가노청 회원을 절대 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합니다. 이에 주교단 명의로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심도직물 등 강화지역 직물회사는 가노청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던 결의를 철회하고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습니다. 강화는 한때 대구, 수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직물도시였습니다. 이때 직물공업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회사가 바로 심도직물이었습니다. 강화군에서는 용흥궁 공원 내에 강화도의 근대화를 이끈 심도직물을 상징하는 심도직물의 굴뚝 위쪽 부분을 잘라 남겨 기념하고 있습니다. 강화읍 천주교 성당에 있는 예수상 위쪽에서 이곳 심도직물 굴뚝을 바라보면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어린 여공들의 창백한 얼굴들이 무성 영화처럼 스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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