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역사축제
부산광역시 동래구 문화로 80 (명륜동)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1995년 제1회 충렬제를 시작으로 32년 동안 이어져 온 동래읍성역사축제는 부산광역시 동래구를 대표하는 역사교육형 체험축제이다.
대한민국 대표 '2026-2027 문화관광축제'로 도약한 제32회 동래읍성역사축제는 1592년의 생생한 감동 속으로 방문객들을 초대한다.
1995년 제1회 충렬제를 시작으로 32년 동안 이어져 온 동래읍성역사축제는 부산광역시 동래구를 대표하는 역사교육형 체험축제이다.
또한 모두가 하나 되어 거대한 줄을 당기는 '동래 세가닥 줄다리기'로 화합의 장을 마련하며, 야외방탈출과 별미당 캐릭터 과자체험 등 트렌디한 체험형 콘텐츠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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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한국의 무덤은 어떻게 변해왔을까요? 지금부터 그 변화되는 모습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선사 시대의 무덤부터 볼까요? 인간이 본격적으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신석기 시대부터입니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자연적인 구덩이에 뼈를 추려 묻은 울진 후포리의 ‘돌도끼 무덤’이지요. 그 밖에 대부분의 신석기 시대 무덤은 구덩이를 얕게 파고 시신을 묻은 뒤 흙이나 조개껍데기로 덮었습니다. 부산에는 범방 조개더미 유적이 대표적이지요. 청동기 시대의 무덤의 특징으로는 돌을 널리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인돌은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등이 있는데, 무덤의 재료로 왜 이렇게 돌을 많이 썼을까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큰 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즉 돌을 이용해 무덤을 만드는 것은 바로 권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지요.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무덤에 돌을 사용할 능력이 거의 없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무덤이 흔적도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의 무덤이 주로 돌로 된 것은, 돌로 된 무덤이 오래도록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늦은 시기가 되면 독무덤과 널무덤도 나타나는데, 독무덤은 항아리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 양식이고 널무덤은 나무로 관을 만드는 무덤 양식 뜻합니다. 청동기 시대 이후,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반도 각지에서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중부 이남의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각각 백제·신라·가야로 성장하지요. 그리고 나라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합니다. 삼한 전기에는 널무덤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무덤이 축조되며, 후기에는 무덤이 커지고 많은 유물을 함께 묻어 부장(副葬)한 덧널무덤이 유행합니다. ‘덧널무덤’은 ‘목곽묘’라고도 불리는데, 나무관인 널을 넣고 그 주변을 판재로 덧대어 둘러쌓아서 방을 만든 구조입니다. 그렇기에 전보다 많은 유물을 넣을 수 있었지요. 이제 삼국 시대가 되면 매장구조로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굴식돌방무덤 등이 나타납니다. 종류도 다양하고 이름도 헷갈리지요? 이 무덤들은 그 존속기간이 조금씩 다르나, 대부분 4세기 전반부터 7세기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삼한 후기에 등장한 ‘목곽묘’는 가야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주된 묘제로 사용됩니다. 여기엔 다양한 유물이 풍부하게 부장됐고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도 행해진 모습이 보여, 강력한 지배권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5세기에는 주검을 위에서 수직으로 넣는 구덩식돌덧널무덤이 행해지는데 여전히 부장과 순장이 지속됩니다. 그리고 5세기 말 이후. 가야의 묘제는 출입구를 마련하여 여러 번 추가 안장이 가능한 앞트기과 굴식 형태로 만들어 집니다.
대본
복천동고분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9년 9월에 주택지 개발을 위한 공사 중 우연히 무덤이 발견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전에는 6·25전쟁 이후 지어진 판잣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지요. 그 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1호 무덤을 조사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계속되는 발굴조사로 그동안 불투명했던 부산의 고대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밝혀졌으며,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가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복천동고분군의 발굴을 바탕으로 1996년 10월에 개관한 복천박물관은 삼한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다른 박물관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가야 문화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무덤의 분포상태를 보면 구릉의 정상부에는 딸린덧널을 갖춘 대형무덤이, 구릉 경사면과 주변 지역에는 딸린덧널이 없는 중소형 무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중심부의 대형 고분은 구릉 남쪽에서 점차 북쪽으로 옮겨가며 만들어졌으며 차례대로 정연하게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복천동고분에서는 191기의 무덤과 토기·철기 등 12,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특히 57호분에서는 함안계 토기뿐만이 아니라 왜계(倭係) 토기도 나와, 당시 왜와의 대외 교류 상황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복천박물관에서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가야의 신비를 함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대본
복천동고분군에서는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목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도질토기가 나왔습니다. 도질토기란 토기를 구울 때, 외부의 공기를 차단하고 내부의 산소를 모두 태워, 흙 속에 있는 금속 성분들이 제 색깔을 내게 하는 토기입니다. 가야의 토기 문화가 바로 이 도질토기 중심이었지요. 이전의 삼한 시대 때는 회색을 띠고 무른 와질토기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4세기의 삼국 시대부터는 와질토기와 도질토기가 공존하며 본격적인 삼국 시대의 토기 문화가 시작됩니다. 복천동고분군의 토기들이 그 변화를 잘 말해주고 있지요. 4세기 후반이 되면 굽다리접시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아라가야의 토기와 일본의 하지키(土師器)토기가 발굴되며, 두 나라의 교류 상황을 알게 해줍니다. 5세기에 이르면 도질토기로 통일되는데요, 굽다리접시의 다리가 길어지고 구멍이 아래위로 뚫립니다. 구멍은 아래위가 직선인 것과 엇갈린 것이 있는데, 엇갈린 것을 신라의 토기로 보면서 이때부터 부산 지역이 신라의 간접적인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합니다. 5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신라 토기의 양이 증가하다가, 5세기 말부터는 전부 신라 토기로 통일됩니다. 이제 이 지역이 신라의 완전한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음을 알려줍니다. 도자기로 이런 역사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이 밖에도 신발모양토기, 오리모양토기, 말머리모양뿔잔 등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주는 토기들도 출토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리와 같은 새 모양의 토기가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데요, 고대인들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거나 봄에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새의 깃털과 오리모양토기를 만들어 무덤에 넣었다고 합니다.
대본
기원전 3세기경, 중국에서 전해진 철기가 점차 남부지방으로 퍼지면서 한반도는 철기문화로 접어들게 됩니다. 철의 제련 기술이 발달하고 다양한 철기를 만들어 사용하게 됨으로써 농산물 생산 능력이 증대됐지요. 여기에 힘입어 인구의 증가와 국가의 발생이 이루어지는 등 급격한 사회 발전을 이룹니다. 삼국 시대에 철은 농기구, 무기, 갑옷의 소재로써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교류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철기의 재료가 되는 덩이쇠가 단일 유적으로는 가장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덩이쇠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에 걸쳐서 주로 부산과 김해지방의 큰 무덤에서 많이 나옵니다. 덩이쇠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매우 다양하게 만들어지지만 5세기에 들면 40cm가 넘는 큰 것과 20cm 이하의 작은 것 등 일정한 크기의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6세기가 되면 그 크기가 극도로 작아집니다. 덩이쇠의 크기와 형태는 만들어질 철기의 크기와도 관계있지만, 덩이쇠를 만드는 제작 집단, 철 생산량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복천동고분군에서는 4세기 중엽부터 무덤 바닥에 덩이쇠가 깔리기 시작하여 6세기 초가 되면 사라집니다. 덩이쇠를 무덤에 묻을 때는 여러 개를 묶어 널의 바닥에 깔았습니다. 당시 철은 오늘날 돈과 같은 역할을 했기에 덩이쇠를 무덤에 넣는 것은 죽은 자의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역할도 했지요. 덩이쇠는 5세기 때 가장 많이 깔리는데, 이는 그때부터 철 생산이 풍부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일부 무덤에서는 철기 제작에 사용한 숫돌, 망치, 집게 등도 출토되었는데, 철기로는 무기류와 농기구류가 다수였습니다. 이외에도 미늘쇠와 굽은 쇠손칼 등 특이한 철기도 있는데, 이런 유물들은 모두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이거나 매장 의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의기적 유물이라 합니다. 의기적 유물들은 대부분 실용성보다는 주술적, 의기적, 상징적 기능으로 크게 유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차츰 덩이쇠처럼 부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대본
무기는 삼국 시대 무덤의 부장품 중 두 번째로 많이 출토됐습니다. 보통 ‘무기’ 하면 검과 같은 공격용만 생각하지만, 갑옷도 방어용 무기의 일종입니다. 방어용 무기의 대표적인 예로는 투구, 목가리개, 방패 등이 있지요. 11호 무덤의 경우, 갑옷인 찰갑에 투구, 목 가리개, 어깨 가리개, 정강이 가리개, 팔 가리개 등 부속구들도 완전히 갖춰져 출토되었습니다. 갑옷은 전사가 가장 치명상을 입기 쉬운 가슴과 등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권력의 상징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특히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철갑옷들은 고대 철제기술의 정수이자, 가야지역에서만 나오는 전례 없는 갑옷이었습니다. 이 갑옷들은 크게 판갑과 찰갑으로 나눠집니다. 판갑은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큰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것이고, 찰갑은 작은 비늘 같은 쇳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것입니다. 찰갑은 물고기 비늘처럼 보인다고 해서 비늘갑옷이라고도 하지요. 무게는 대략 10kg에, 1mm의 두께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이러한 갑옷과 부속구들은 실제 전쟁에서 완벽한 방어가 가능했을까요? 정답은 ‘그렇다.’입니다. 가야의 철갑옷은 30~40m 거리에서 날아온 화살도 튕겨 나갈 정도의 방어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경첩을 달아 갑옷을 입고 벗기도 편리하게 제작하여 실용성도 있었습니다. 실제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여하는 만큼 움직임에 불편함도 적어야겠죠? 그럼 지금부터 가야의 과학적이고 수준 높은 무기 유물들을 천천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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