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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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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
외국인
Foreigner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커플
Couple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가족
Family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솔로
Solo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 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장소 소개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미륵사터의 남쪽에는 2기의 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를 받치는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며, 약간만이 드러나서 그 원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주는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마주 보는 면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와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등이 있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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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가이드

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
익산 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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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는 동양 최대라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백제의 사찰 미륵사가 있었던 절터입니다. 미륵사는 백제의 제 30대 왕인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호국사찰이죠. 건물은 사라졌으나 남아있는 거대한 석탑이 본래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미륵사에는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어느 날 무왕 부부가 용화산의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던 도중 산 아래 큰 연못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경배 후 이 연못을 메우고 이곳에 절을 세웠는데 이때, 완공된 절이 바로 미륵사라고 합니다. 미륵사지는 가운데 목탑과 동·서 석탑이 있고, 이와 나란히 3개의 금당이 자리 잡은 모습으로 지금까지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가람배치라 하는데, 미륵사지는 3탑 3금당의 가람배치로 되어있지요. 3개의 가람들은 회랑으로 서로 이어지고 강당을 공유하고 있어 전체를 하나의 사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독특한 건물의 배치와 대한민국 최대인 석탑을 통해 백제문화를 엿볼 수 있는 미륵사지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목탑의 특징을 간직한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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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의 특징을 간직한 석탑 건물 안에서는 복원을 위해서 서탑을 해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어요. 먼저 바닥을 한번 내려다보세요. 바닥면의 규모만으로도 거대한 탑의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여기저기 쌓여 있는 석재들을 보면 이 탑은 석탑임이 확실한데요. 그런데 좀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탑은 초기에는 목탑 양식이 많았어요. 하지만 목탑은 화재로 인해 사라질 위험이 많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화강암을 이용해서 석탑을 짓게 되었죠. 지금 보고 계신 이 석탑은 형태나 축조 방법에 있어서는 목탑의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목조 건물을 짓듯이, 가공한 석재를 하나하나 조립하는 방법으로 탑을 세웠어요. 가장 아래에 낮고 넓은 기단을 깔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뒤에 판석으로 벽면을 만들었는데요. 이 때 기둥은 윗부분보다 아랫부분을 더 넓게 만드는 방식으로 다듬었어요. 보는 사람이 훨씬 더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한 거죠. 또 탑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은 마치 기와 지붕처럼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어요. 이 모두가 바로 목탑의 양식인 것이죠. 특히 3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1층이 특이한데요.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었어요. 굉장히 보기 드문 구조이죠. 복원되어 있는 동탑에서 이 부분을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석탑의 1층 구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요? 불국사의 석가탑과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들은 대부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예요. 따라서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양식이 변화되는 시기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 같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서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답니다. 그럼 이 서탑이 어떻게 조사되고 복원되어 왔는지 알아보도록 할까요? 석탑의 복원과정 유물 전시관에서 모형으로 보셨던 것처럼, 서탑은 발견 당시(1910년 이전에) 매우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어요. 건물 규모도 6층 이상이라는 것까지만 확인할 수 있었지요. 주변에 전시된 사진을 통해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일제강점기에 이 탑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인 1910년 사진을 보면, 전체가 붕괴 직전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일본인들이 급하게 콘크리트를 발라서 보수를 했는데요. 당시에 콘크리트는 첨단 재료였지만, 보수된 모습은 조잡할 수밖에 없었죠. 1998년 정밀구조안전진단을 한 결과,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매우 컸어요. 그래서 해체를 해서 보수를 하기로 결정했답니다. 윗부분부터 차례로 해체를 하면서 콘크리트를 제거해갔는데요. 우리나라의 전통 석공들이 일일이 정으로 쪼아가며 제거해낸 콘크리트 양이 약 185톤이나 됐죠. 그 과정에서 후대에 여러 번 보수를 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어요. 그리고 뜻하지 않게 엄청난 유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바닥면을 한번 내려다보세요. 정중앙에 놓인 돌에 작은 빈 공간이 보이지요? 그 구멍이 바로 사리공이에요. 바로 저곳에서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죠. 오랜 세월 품어왔던 소중한 유물을 내어준 서탑은 보시다시피 완전히 해체되었어요. 탑 하나를 해체하고 다시 쌓는데 10년이 넘게 걸릴 만큼 매우 힘들고 섬세한 작업 과정이지요. 지금도 전체적인 축조 방식에 대해 정밀히 검토를 해가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보시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제 복원 현장을 빠져나와서 서탑이 있던 자리의 북쪽, 금당지로 가 보실까요?

사찰의 중심이 된 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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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중심이 된 금당 이곳은 서탑이 서 있던 자리의 뒤쪽으로 금당이 있었던 곳이에요. 금당은 불상을 모신 건물입니다. 사찰에서 금당이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큰데요. 본래 불교신앙의 중심은 탑이었어요. 그런데 불상이 만들어지면서 금당이 더 중요해진 거죠. 부처의 구체적인 모습이 눈앞에 있으니 불상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겠지요. 이처럼 금당이 사찰의 중심이 되면서, 하나의 금당을 중심에 놓고 앞마당 양쪽에 탑을 세우는 식의 절이 만들어졌어요. 혹은 아예 탑이 없는 절도 생겨났답니다. 다른 사찰을 방문할 때 이 부분을 눈여겨보셔도 흥미로울 듯싶네요. 그런데 미륵사지를 보면 금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탑이 여전히 절의 중심에 서 있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나라에 유입된 불교의 성격과 연관이 있어요. 지금도 그렇듯이 우리의 불교는 수행을 통한 해탈이나 불교 경전의 탐구보다는, 복을 기원하기 위한 신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죠. 따라서 백제인들 또한 미륵사를 지을 때에 사리를 봉안한 탑을 세워 그 영험함을 통해 복을 기원했던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음은 미륵사의 중원에 있는 목탑지로 자리를 옮겨볼까요?

목탑은 왜 9층으로 복원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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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은 왜 9층으로 복원되었을까? 미륵사지의 중심에 있는 목탑지에 서면, 양쪽의 탑지보다 이곳이 조금 더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전시관에서 복원 모형을 보셨듯이 이 자리에 서 있던 목탑이 서탑과 동탑에 비해 더 컸기 때문이죠.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목탑은 기단부 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어요. 다만 서탑이 목탑 양식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중앙의 목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지요. 여기에 서 있던 목탑은 9층이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탑이 6층 이상이라는 점, 또 동탑지에서 7층과 9층으로 여겨지는 옥개석 등이 출토된 것을 들어, 목탑도 9층일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요. 그보다 더 큰 힌트는 바로 이웃나라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에 있답니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호국의 염원으로 탑을 짓기 위해 백제의 장인을 불러들였는데요. 그가 바로 아비지이죠. [아비지] “나, 백제의 아비지는 왕명을 받고 탑을 세우기 위해 신라로 왔다. 그런데 탑의 기둥을 세우던 어느 날, 악몽을 꾸었다. 나의 고국 백제가 멸망하는 꿈이었다. 그 후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날도 넋을 빼고 앉았는데, 갑자기 땅이 요동쳤다. (효과음)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노승과 장사가 나타나 순식간에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졌다. 그에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기어이 탑을 완성시켜나갔다.” 신라를 보호하기 위한 탑을 세운 주인공이 백제인이라는 점이 묘한 여운을 남기는데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통해서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의 기술로 지어졌고, 따라서 9층 목탑이 당시 백제의 일반적인 양식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럼 이 목탑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유물을 토대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까지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요. <삼국사기>에서 신라 성덕왕 18년, 그러니까 719년에 이곳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나와 있어요. 실제로 목탑지 주변에서 많은 목탄과 기와, 그리고 불에 탄 흙이 발견되었지요. 당시, 목탑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만큼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 거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옆에 복원되어 서 있는 동탑을 살펴보죠.

복원된 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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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동탑 동탑은 완전히 파괴되어서 터만 남아 있었어요. 지금의 이 탑은 1991년에서 93년에 걸쳐 복원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목탑이 서 있었던 것으로 알았어요. 처음 미륵사지를 조사한 일본인들이 서탑과 같은 규모의 목탑이 여기에 서 있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1975년 발굴 조사를 통해 목탑이 아닌 석탑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죠. 탑의 각층을 이루고 있던 석재들이 발견되었거든요. 이 9층 탑을 복원하는 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재 2,000여 개가 사용되었어요. 무게로 따지면 약 2,700톤이 된다니 정말 큰 작업이었겠지요? 복원된 탑의 구조를 살펴볼까요? 맨 아래 기단의 중앙을 보세요. 탑에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네 개의 면에 모두 설치되어 있어요. 특히 사면 모두 1층의 가운데 칸에 문이 있는 것이 특이한데요. 한번 들어가 보세요. 잠깐, 이왕이면 동쪽을 통해서 들어가 보세요.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궁금하시죠? 탑을 자세히 둘러보세요. 색깔이 다른 부분이 드문드문 보이시나요? 복원할 때 이 터에서 발견된 본래의 석재 35개를 같이 사용했거든요. 그중에서 가장 많은 석재가 동쪽 면에 채워졌지요. 이렇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탑의 구조는 통일신라 이후에 거의 사라지죠. 그래서 더욱 독특한 양식이라 할 수 있어요. 다시 밖으로 나와서 귀를 기울이면 풍탁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네, 유물 전시관에서 보셨던 그 풍탁을 복제해서 달아놓은 것이에요.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동탑이 완벽한 복원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에요. 복원에 쓰인 석재를 석공들이 직접 정성들여 가공한 것이 아니라 기계로 가공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원래 탑보다도 날카롭게 보이죠, 그렇지만 탑의 실제모습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탑의 주요한 특징을 경험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미륵사지를 모두 둘러보셨는데요. 이곳 익산은 무왕이 태어난 곳이자, 사후에 그가 묻힌 곳이기도 해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를 하기 위해 지은 왕궁의 유적도 남아 있지요. 또 그가 이곳에 지었던 미륵사는 익산을 당시 백제의 핵심 도시로 만들려는 바람과 맞닿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른 유적도 둘러보시면서 무왕의 꿈을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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