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문화거리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문화길 38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주변 볼거리로는 중구 골목투어, 동성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등이 있다.
거리에 조성된 조형물은 포토존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2004년 건립된 봉산문화회관은 다양한 전시회와 공연을 개최하여 대구 시민의 문화 예술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미술 관련 문화 예술 거리로 조성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에는 작품 판매 및 미술 재료 판매, 표구 제작 위주였으나 현재는 다양한 작품이 전시 및 판매되고 있다.
여러 갤러리가 들어서면서 대구를 대표하는 지역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외 다양한 미술 작품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장소 소개
위치
이런 곳도 함께 보세요
같은 유형의 인기 명소오디오 가이드
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대구향교로 진입하는 계단 옆 ‘하마비(下馬碑)’라고 쓴 표석에 먼저 시선이 갑니다. ‘하마’는 말에서 내려 걸으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궁궐이나 왕릉, 문묘, 종묘 등 경의를 표해야 하는 장소 앞에 세웠습니다.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면 ‘범마(犯馬)’라는 괘씸죄에 걸려 호되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요. 엄숙하게 예를 갖추라는 의미의 하마비가 강경한 자세로 여기 있는 건, 이곳이 바로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을 기리며 조선의 유생들이 유학을 공부한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역사회 내 국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서당 공부를 마친 16세 이상의 학생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예를 익혔습니다. 향교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392년 조선의 건국 이래 더욱 활발해집니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고을마다 향교가 설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은 유교 국가의 위상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지요. 600여 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에 남아있는 향교는 200여 개가 넘습니다.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글귀가 담긴 입춘첩이 붙은 외삼문을 지나면, 마치 다른 세상인 양 푸르고 평온한 향교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과 유생들의 교실로 쓰인 명륜당, 기숙사로 활용한 동재와 서재가 반듯하게 자리하고,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백옥상이 향교의 중심을 지키며 서있습니다. 그 옛날, 운동장 대신 대성전 뜰을 거닐고 명륜당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경전을 읽거나 숱하게 동재서재를 들고 났을 어린 유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398년에 세워진 대구향교는 기나긴 세월만큼이나 많은 파란곡절을 겪었습니다. 화재와 재건, 소실과 중건, 이전을 반복하다 1932년, 겨우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전국 어디든 향교가 있거나 있었던 동네를 가리켜 ‘교동’ 혹은 ‘명륜동’이라 부르는데, 대구향교는 현재 교동이 아닌 남산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유생들이 대구향교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대구 중심에서 외곽으로 강제 이전한, 일본의 횡포였지요. 현대사회에서 유교는 고리타분하고 구시대적인 사상으로 오해 받기 쉽지만, 사람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유교입니다. 유교의 핵심 가치인 어질 인(仁)이야말로, ‘사람다움’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더 많은 예절과 존중, 질서와 안정이 필요한 무한경쟁시대에, 대구향교에서 넓은 혜안을 찾아보길 바랍니다.
대본
대구향교로 진입하는 계단 옆 ‘하마비(下馬碑)’라고 쓴 표석에 먼저 시선이 갑니다. ‘하마’는 말에서 내려 걸으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궁궐이나 왕릉, 문묘, 종묘 등 경의를 표해야 하는 장소 앞에 세웠습니다.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면 ‘범마(犯馬)’라는 괘씸죄에 걸려 호되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는데요. 엄숙하게 예를 갖추라는 의미의 하마비가 강경한 자세로 여기 있는 건, 이곳이 바로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을 기리며 조선의 유생들이 유학을 공부한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역사회 내 국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서당 공부를 마친 16세 이상의 학생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예를 익혔습니다. 향교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392년 조선의 건국 이래 더욱 활발해집니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고을마다 향교가 설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은 유교 국가의 위상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지요. 600여 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에 남아있는 향교는 200여 개가 넘습니다.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글귀가 담긴 입춘첩이 붙은 외삼문을 지나면, 마치 다른 세상인 양 푸르고 평온한 향교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과 유생들의 교실로 쓰인 명륜당, 기숙사로 활용한 동재와 서재가 반듯하게 자리하고,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백옥상이 향교의 중심을 지키며 서있습니다. 그 옛날, 운동장 대신 대성전 뜰을 거닐고 명륜당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경전을 읽거나 숱하게 동재서재를 들고 났을 어린 유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398년에 세워진 대구향교는 기나긴 세월만큼이나 많은 파란곡절을 겪었습니다. 화재와 재건, 소실과 중건, 이전을 반복하다 1932년, 겨우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전국 어디든 향교가 있거나 있었던 동네를 가리켜 ‘교동’ 혹은 ‘명륜동’이라 부르는데, 대구향교는 현재 교동이 아닌 남산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유생들이 대구향교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대구 중심에서 외곽으로 강제 이전한, 일본의 횡포였지요. 현대사회에서 유교는 고리타분하고 구시대적인 사상으로 오해 받기 쉽지만, 사람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유교입니다. 유교의 핵심 가치인 어질 인(仁)이야말로, ‘사람다움’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더 많은 예절과 존중, 질서와 안정이 필요한 무한경쟁시대에, 대구향교에서 넓은 혜안을 찾아보길 바랍니다.
Nearby places worth pairing
Live distance-sorted picks around 봉산문화거리Book 봉산문화거리 via our partners
Compare tours, skip-the-line tickets and nearby st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