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LENS

창신동골목길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2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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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
외국인
Foreigner

창신동 골목길은 종로 골목길 탐방 코스 중 일부로 주민들이 실제 생활하는 거주지이다.

커플
Couple

아픈 역사의 흔적인 채석장 ‘창신동 절개지’, 새벽의 문을 여는 '문구 완구 시장&수족관 상가', 마을 곳곳에서 봉제 기계와 라디오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봉제거리박물관 등 볼거리가 있다.

가족
Family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영화 <기생충> 기택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던 날, 억수같이 퍼붓던 비는 물줄기를 이루며 사납게 흘렀다.

솔로
Solo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영화 <기생충> 기택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던 날, 억수같이 퍼붓던 비는 물줄기를 이루며 사납게 흘렀다.

장소 소개

창신동 골목길은 종로 골목길 탐방 코스 중 일부로 주민들이 실제 생활하는 거주지이다. 아픈 역사의 흔적인 채석장 ‘창신동 절개지’, 새벽의 문을 여는 '문구 완구 시장&수족관 상가', 마을 곳곳에서 봉제 기계와 라디오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봉제거리박물관 등 볼거리가 있다. 또한 국민 화가 박수근과 미디어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사연이 담긴 골목길로 영화 기생충의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 영화 <기생충> 기택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던 날, 억수같이 퍼붓던 비는 물줄기를 이루며 사납게 흘렀다.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는 창신동의 골목길은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기택 가족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나타내주는 좋은 배경이었다. 창신동은 7~80년대의 흔적이 느껴지는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동네로 구석구석 정겨움이 묻어난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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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
9코스 안내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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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안녕하세요? 저는 종로모던길 9코스 ‘인생의 길’을 안내할 노태영입니다. 아, 오랜만에 낙산에 올라왔네요. 이곳은 제가 20대를 보냈던 곳이에요. 1987년 패션 업계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와 미싱사로 시작해서 그 꿈을 이루게 해준 곳이지요. 그때 낙산은 꽤나 높아 보였는데요, 서울 곳곳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지금은 그저 아담한 언덕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낙산 주변 동네의 모습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네요.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쁜 카페들이 많이 생겼어요. 그때는 언덕배기를 오르는 게 힘들어서 성곽 길을 원망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올망졸망 자리 잡은 전망 좋은 카페에서 종로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종로 모던길 9코스의 주제는 인생의 길이죠?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움직이고 있으니, 노동하는 모든 사람의 인생이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요, 막상 인생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대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 그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을 천천히, 그리고 성실하게 안내하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저보다 먼저 인생의 뜻을 찾아내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일하고 또 생활했던 동네를 중심으로 종로모던길 아홉 번째, 인생의 길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낙산의 한양 도성을 기준으로 성곽의 안쪽은 이화동과 충신동, 바깥쪽은 창신동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성곽의 안쪽 이화동입니다.

이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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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이화동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배 밭이 있었고요, 이화정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낙산에 기댄 이 동네를 이화마을이라고 부릅니다. 참 이쁜 이름이죠? 그런데요, 이화마을의 역사를 보면, 실제 모습은 이름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6.25 전쟁 이후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이 낙산 자락에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생겨난 마을이라고 하네요. 예전의 판잣집이 남아있진 않지만, 경사가 심한 땅에 집을 짓고 그 집들을 따라 길이 난 마을을 보면, 예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걸어온 길 아랫자락에 이승만 전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조금 나은 모습이었다고 하네요. 1958년에 이화장 주변을 정비하기 위해 지금의 LH공사에 해당하는 대한주택영단에서 근대적 도시 거주지인 낙산 국민주택단지를 조성한 덕분이죠. 그때 지은 국민주택은 대지 40평에 건평 15평 규모로 한 개 동에 4가구씩 입주하는 2층 건물이었고요, 모두 142세대가 들어섰습니다. 흙 대신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집이었고요, 지붕에는 슬레이트를 얹었죠. 그리고 침실과 분리된 거실이 있었고, 내부에 화장실까지 있어서 정말 환상적이었죠. 지금이야 더 좋은 집들이 많아 쉽게 공감하기 어려우시겠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초현대식 주택이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 옆, 낙산의 경사지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은 집들이죠. 어느덧 70여 년이 지나다 보니 많이 낡았네요. 그래도 일부 주택들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록되어 작은 박물관이나 카페로 문을 열고 있다고 하니까, 기회가 된다면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네요. 그런데, 좋은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2006년인가, 공공 미술사업인 낙산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이화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졌어요. 예술가들이 다양한 그림을 그렸고 주거 환경 개선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은 깨끗하고 예뻐졌죠. 하지만 소문을 듣고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면서 골목은 소란스러워졌고, 주민들의 평온한 일상이 쨍그랑 깨진 겁니다. 관광객에게는 이곳이 아름다운 옛 모습과 벽화를 간직한 매력적인 마을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공간이었으니까요. 참, 우리가 걷고 있는 ‘인생의 길’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상의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 대부분이니까요, 되도록 조용히 걸어야겠네요. 고성방가 금지! 이화마을 정상에 오르면 잠시 쉴 수 있는 이화마루 공간이 있어요. 주변에 ‘이화동 갤러리’, ‘ 칠보미술관’ 작지만 예쁜 공방들도 보이네요. 이곳 성곽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정말 시원하고 멋지죠? 성곽 아래로 펼쳐진 마을이 바로 앞으로 가게 될 창신동 이랍니다. 자, 그럼 이화마을을 떠나 제가 살던 창신동으로 가 볼게요. 낙산 성곽으로 난 문을 통해 나가면 바로 창신동입니다. 성벽에 난 암문을 지나서, 그러니까 도성 밖으로 나가서 우리가 찾아갈 곳은 창신동 봉제 골목입니다. 봉제 골목으로 가는 길은 여럿이지만 우리는 낙산의 성곽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도록 하지요. 물론 주택가 쪽으로 난 조금 가까운 길로 갈 수도 있지만, 그 길은 인도가 없어 다소 위험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낙산 성곽 길의 운치를 놓칠 수는 없죠.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삶에 지치는 순간이 오면 낙산의 성곽을 따라 산에 오르곤 했어요. 높은 산은 아니지만 멀리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언젠가 저곳에서 제가 만든 패션 아이템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꾸었지요. 저에게 이곳은 추억이 담긴 특별한 곳이랍니다. 성곽 길을 따라 약500미터 정도 내려가면 왼쪽으로 덕산파출소가 보일 거예요. 파출소 앞길의 오르막길을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150미터 정도 내려갈게요.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그곳이 바로 창신동 봉제거리입니다. 길 찾기가 어렵진 않았나요? 이 동네가 골목이 많고 경사진 곳도 있어서 길 찾기가 쉽진 않아도 도로명을 잘 보시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작은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미싱 소리를 들으셨나요?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아요.

창신동 봉제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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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창신동 봉제거리는 봉제거리 박물관이라고도 부른답니다. 말 그대로 이 길이 하나의 박물관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지요. ‘드르륵, 드르륵’ 미싱 소리, 바쁘게 움직이는 오토바이 소리. 봉제거리 어느 곳에서든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어요. 그래도 제가 일하던 1990년대에 비하면 지금은 조용한 편이죠. 한때 3,000여 곳이었던 봉제 공장들이 지금은 900여 곳 정도만 남았다고 하더군요. 창신동에 본격적으로 봉제 공장들이 들어선 것은 1970년대였어요. 처음에 봉제 공장은 동대문 평화시장에 있었죠. 거기가 우리나라 최대 의류 시장이었거든요. 그런데 의류 수출이 늘고 평화시장에 도소매 상점이 점포 규모를 확대하면서, 봉제 공장들은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평화시장에서 멀지 않은 창신동이었죠. 그전까지 창신동은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생활하는 곳이자 일터가 되었던 것이지요. 창신동에는 사는 집에서 봉제 작업을 하는, 그러니까 한두 명이 일하는 가내수공업 방식부터 10명 남짓의 노동자가 일하는 소규모 봉제 공장, 의류 제작 전 과정이 한 곳에 이루어지는 종합 공장까지 다양한 형태의 봉제 공장들이 있어요. 보통 디자인한 옷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다섯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되지요. 디자이너가 그린 스케치를 옷으로 만들 수 있게 옷본을 만드는 ‘패턴’, 옷본에 따라 옷감을 자르는 ‘재단’, 재단된 원단을 재봉틀로 이어붙이는 ‘재봉’, 손바느질로 안감, 주머니, 단추를 다는 마무리 작업인 ‘마도메’, 마지막으로 실밥을 정리하고 다림질을 하는 정리 작업인 ‘시야게’지요. 하하, 본의 아니게 일본말이 나왔는데 다들 이렇게 쓴답니다. 마도메는 손작업, 시야게는 완성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워낙 입에 붙어서요. 양해 부탁드려요. 창신동 봉제거리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이루어진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옷을 생산하기 위해 각각의 작업이 분업화, 전문화되어 있지요. 디자인이 오전에 도착하면 그날 저녁 완성된 옷으로 만들어지는 놀라운 곳이 이곳 창신동입니다. 봉제거리를 걷다가 미싱 소리가 나는 곳이 있다면 재봉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스팀 연기가 올라온다면 그곳은 틀림없이 완성 작업장이지요. 아, 역시 우리말로 바꾸니까 어색하긴 합니다. 하하. 지금 우리가 와있는 봉제거리는 큰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니 하청을 받아 재봉 작업을 하는 곳들이에요. 주문을 받아 전체 공정을 담당하는 공장들은 큰길가에 있지만, 일부 작업을 하는 곳은 창신동에서도 깊숙한 안쪽에 있어요. 보통은 주택의 지하층과 1층에는 소규모 공장이, 2층에는 주거 시설이 있답니다. 서민들의 소중한 일터이자 일상을 이어가는 곳이죠. 재봉은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에요. 무거운 원단을 다루는 재단사는 대부분이 남자들이었고, 하루 종일 미싱을 돌리는 미싱사는 대부분 여자들이었어요. 제가 일할 때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봉제 일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때는 대부분의 공장이 저녁 8시에는 작업이 끝났어요.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14시간씩 재봉틀을 돌렸고 철야 작업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버텼나 모르겠어요. 가족 생각, 혹은 수출 역군이라는 사명감으로 젊은 시절 대부분을 작업장에서 베이고 찔리고, 또 실 먼지를 마시며 열심히 일한 그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그분들 가운데 많은 분이 지금도 같은 이유로 그 자리를 지키며 일하고 있죠. 저 역시 이곳에서 미싱 일을 하며 언젠가는 직접 옷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키웠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젊은 시절의 저를 만난다면 어깨를 두드려주며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습니다. 지금은 브랜드 의류 제품들이 대세를 이루고 인건비가 싼 외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들여오는 바람에 창신동의 모습도 많이 변했어요. 그래도 패션 1번지 동대문 시장의 배후 생산지로 대한민국의 의류 산업을 이끌었고, 또 이끌어 가고 있다는 자부심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에요. 자, 이제 이곳을 떠나 또 다른 인생의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창신동의 골목길은 찾아가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일제시기에는 이곳에 도시형 한옥이 들어섰고요, 6.25 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지은 판잣집이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불량 주택을 철거한 자리에 다세대, 다가구 주택, 아파트까지 들어서면서 지금처럼 거미줄같이 복잡한 길이 생긴 거죠. 이제 찾아갈 곳은 낙산의 경사면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길이어서 두 다리에 불끈 힘을 주셔야 할 겁니다. 자, 우리 목표는 채석장 전망대입니다. 봉제거리에서 채석장 전망대로 가는길에 구불구불한 ‘회오리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재미난 놀이터가 나와요. 2019년 문을 연 ‘산마루 놀이터’입니다. 이곳이 봉제 산업의 중심지라는 지역적 의미를 담아 거대한 골무 모양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참 이색적이죠. 힘들게 올라왔으니 여기에서 잠깐 쉬어가는 것도 괜찮겠군요. 잠시 쉬셨다면 다시 전망대를 향해 걸어보세요. 낙산 가장 높은 곳에서 채석장 전망대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채석장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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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이제 돌아서서 걸어온 길을 보세요. 남쪽으로 동대문에서부터 낙산 성곽 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만났나요?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어요. 우리가 걸어 올라온 이곳은 ‘창신동 절벽 골목’이라고 불러요. 절벽 골목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북쪽 풍경을 보면 알 수 있죠. 건너편으로 보이는 숭인동 동망봉이 흉물스럽게 잘려 나간 곳, 움푹 파여서 절벽이 된 곳이 보이지요? 일제시기 화강암 채취를 하면서 생겨난 곳입니다. 우리가 걸어 올라온 낙산 역시 동망봉 쪽으로 채석장이 만든 절벽이 있답니다. 1910년 일제는 국권을 침탈한 뒤, 식민지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을 계획을 세웠어요. 남산의 총독부 건물이 좁다고 느꼈기 때문이었겠죠. 새로운 총독부 건물은 경복궁 안쪽에 일본의 권위가 최대한 드러나도록 거대한 서양식 건축물로 지었어요. 이를 위해 압록강 인근의 낙엽송, 경기도와 황해도의 대리석, 한강의 모래와 자갈을 비롯해 20만 개의 화강암이 들어갔죠. 바로 이곳이 그 화강암을 채취한 곳입니다. 1924년에는 아예 이곳을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지정한 뒤, 날마다 발파를 이어가며 화강암을 채취했다고 해요. 그렇게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공되었고, 조선은행, 서울역, 경성부 청사도 이곳에서 화강암을 채취해서 지었죠. 창신동과 숭인동의 채석장은 광복 이후에도 얼마 동안 쓰였어요. 그러다가 1960년 폐쇄된 이후 절개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죠. 그곳을 지금은 절개지 마을 혹은 절벽 마을이라 불러요. 서울의 한복판, 종로에 이런 일제 침탈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또 이렇게나 올망졸망 어찌 보면 아슬아슬한 모습의 집을 짓고 삶을 이어 왔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들이 더욱 많고요. 이곳에서 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풍경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채석장 흔적, 그리고 반대편의 고층 빌딩이 만드는 마천루. 두 개 모두 지금 종로, 서울의 모습이겠죠? 다음으로 우리가 갈 곳은 아래쪽 도로 옆에 있는 창신초등학교입니다.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가면 왼쪽으로 ‘종로 종합 사회복지관’이 보일 거예요. 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큰길까지 쭉 내려가다 보면 창신초등학교가 나와요. 길이 그리 넓지 않고 경사도 불규칙해요. 천천히 그리고 조심해서 내려가는 거 잊지 마세요. 창신초등학교 정문 옆 벽면을 보면 ‘원흥사 터’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어요. 거기에서 말씀을 이어갈게요.

원흥사 터(창신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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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코스 인생의 길 위대한 일상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 (안내) 배우 강애심 (배역) 노태영(봉제사,의류사업가) 지금은 주변에서 사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곳은 1902년, 조선의 여러 절을 총괄하는 사찰 인 원흥사가 있었던 곳이에요. 광무 6년(1902), 고종은 황실의 재산으로 현 창신초등학교 부지를 사들이고 ‘대본산 원흥사’라는 현판을 내려주었다고 해요. 사실 승려들은 조선 시대 내내 도성에 출입할 수가 없었어요. 1895년 수백 년 만에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허가되면서 비록 동대문 밖이긴 하지만 도성 근처에 원흥사가 지어질 수 있었다고 해요. 이후 원흥사는 대본사의 지위는 잃게 되었지만 1906년에 지금의 동국대학교로 발전하게 되는 불교 전문 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이곳에 세웠어요. 또 1908년에는 승려 대표 52명이 이곳에 모여 한국불교종단의 이름을 ‘원종’으로 부르기로 정했죠. 그리고 지금의 종로구 조계사 인근에 각황사를 세워 원종 종무원을 그쪽으로 옮겨 갔어요.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사찰령을 시행하며 원흥사는 폐사되어 없어지고 이듬해 능인사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가 4년 후 현 창신초등학교가 개교했죠. 이제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를 향해 걸어가야겠네요. 종로로 걸어가 ‘동묘앞역’에서 3번 출구 쪽으로 가 볼게요. 그곳이 우리가 다음에 살펴볼 동묘 벼룩시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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