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국삼장비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4가지 관점으로 본 이 장소
KORLENS 큐레이션명국삼장비는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북루 아래에 위치한 비석이다.
이 비석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가을, 공주에 주둔하면서 왜군으로부터 방어해 준 명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 위관 임제, 유격장 남방위의 업적을 기린 사은 송덕비이다.
본래는 공주 금강변 남안에 세워졌던 것을 공산성으로 옮겨왔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일부 글자를 훼손하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매립하였던 것을 해방 후 다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총 3개의 비석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명나라의 3장수는 정유년 이듬해인 선조 31년 가을, 공주에 이르러 군기를 엄히 다스리는 한편 주민들을 정성껏 보살펴, 공주민은 왜구의 위협하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고 임진년에
장소 소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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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오디(Odii) 음성 해설대본
공산성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웅진을 지키던 산성입니다. 옛 이름은 웅진성인데 고려 시대 이후 공산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데에는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본래 백제의 수도는 지금의 서울이었는데,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후 어쩔 수 없이 수비에 유리한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것이지요. 수도를 옮긴 후 새로운 출발을 위해 백제는 많은 노력을 했어요. 웅진 시대 최고의 왕으로 여겨지는 무령왕은 신구 귀족을 고르게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해 나갔으며, 왕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해 지방 세력을 통제시켰습니다.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백제가 힘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공산성은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직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어요. 공산성 안에는 연지, 연회 장소 임류각,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산정 등이 있지요. 공산성은 웅진 시대 이후에도 활발히 이용되었습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했어요. 통일신라 때의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곳도 이곳 공산성이랍니다. 성왕이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를 지켰던 공산성은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우리의 유산입니다.
대본
백제 왕궁터의 흔적 쌍수정 앞에 있는 백제의 왕궁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궁터를 발굴하게 된 데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중요한 단서가 되었어요. 산성 안에 있었던 임류각이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라는 내용인데요. 이 기록에 따라 1985년에 발굴조사가 시작됐지요. 그 결과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가 발견되었어요. 현재 울타리가 쳐져 있는 곳이죠. 이 왕궁터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는데요. 특히 기와의 끝을 장식하는 수막새가 발굴되었어요. 백제 양식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건물의 높은 위상을 말해주는 유물이에요. 또한 기와도 다량 발견되었는데요. 그중에는 왕궁을 뜻하는 ‘궁(宮)’자가 새겨진 것도 있었어요. 이 왕궁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은 건물터 앞에 있는 거대한 연못이에요. 이 연못은 발굴 당시에도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서 부서진 부분만 보수해놓았어요. 연못의 형태를 보면 윗면이 넓고 바닥면이 그보다 훨씬 좁은 원형이지요. 이 연못이 백제의 어느 왕조 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는데요.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때 연못을 파서 진기한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어요. 동성왕이 웅진시대의 왕이긴 하지만, 이 기록 속의 연못이 지금 보고 계신 연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백제는 왕궁 안에 연못을 만들어 조경을 했기 때문에, 이 연못도 왕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대본
백제 토성의 흔적이 엿보이는 동문 공산성의 동문에는 성을 축조할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공산성은 돌로 지어진 석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 시대에 돌로 다시 쌓은 것이랍니다. 이 동문 근처에는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토성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 있답니다. 동문을 나와서 오른쪽 아래를 살펴보세요. 고스란히 남아 있는 토성의 흔적이 보이시나요?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어떻게 흙으로 성을 쌓은 것일까요? 백제인들은 판축기법이라고 하는 건축공법을 사용했는데요. 판축기법이란 사각의 나무 안에 고운 흙을 넣고 다지는 방식을 말해요. 그다음 잔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깔고 잘 다진 흙을 일정한 간격으로 마치 시루떡을 쌓듯이 한층 한층 쌓아올렸어요. 이를 부엽공법이라고 하죠. 서울에 남아 있는 한성백제 시대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도 이러한 건축공법이 사용되었어요. 판축기법으로 성을 쌓으려면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한데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토성의 흔적을 보면, 공산성이 산의 능선을 따라서 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약 467미터 가량 이어지는 이 토성 길을 천천히 한번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네요.
대본
1980년 공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임류각 터로 추측되는 곳을 발견하였고, 남아 있는 구조와 역사 기록을 근거로 1993년 그 터에 임류각을 복원하였습니다. 건물을 보면 한눈에 봐도 규모가 제법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공산성에서 가장 큰 누각인 임류각은 대체 어떤 용도로 사용된 것일까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임류각이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동성왕이 좌우의 측근과 더불어 임류각에서 밤이 새도록 연회를 즐겼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동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혁신적인 노력을 했지만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곤 했는데요. 그럼에도 동성왕은 연일 연회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에 신하들은 나라를 보살펴달라는 간언을 올리곤 했어요. 하지만 동성왕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죠. 이후 동성왕은 자신이 등용했다가 다시 지방으로 보내버린 신하의 자객에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처럼 삼국사기는 동성왕을 백성을 돌보지 않고 호화로운 연회를 즐기는 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재건을 위해 상당한 업적을 쌓았음에도 말이죠. 임류각 역시 동성왕의 말년 실정의 대표적인 장소로 비추어집니다. 하지만 임류각은 도교적 요소가 가미된 원지, 즉 정원과 연못 유적으로 이후 우리나라의 원지 조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장소이기도 하답니다.
대본
백제시대의 연못 만하루 옆에 있는 것이 바로 백제시대의 연못인데요. 발굴되기 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다고 해요. 공산성 안에는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중에서 두 개가 발견되었지요. 왕궁터에서 보신 연못과 이곳 연지입니다. 보고 계신 이 연지는 왕궁터 연못처럼 돌을 쌓아올린 형식인데요. 왕궁터의 연못이 원형이었던 것과 달리, 이 연못은 각이 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가지런하게 단이 생기도록 돌을 쌓았는데요. 보시다시피 위는 넓고 아래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구조를 띠고 있어요. 그래서 연못을 내려다보면 마치 석탑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형상을 띠고 있지요. 연못 옆에 있는 만하루는 조선후기에 지어진 누각인데요. 앞으로 흐르는 금강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니, 만하루에 올라 강물을 바라보면서 잠시 쉬어가시는 건 어떨까요? 공산성의 백제 유적에 대한 안내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참, 산성을 걸어나가실 때 주변의 고목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공산성이 품어 온 시간의 역사를 한껏 느껴보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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